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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허청 문턱은 낮고, 시장 문턱은 높다 — 유럽(EU) 이야기유럽특허청(EPO) 심사기준과 EU ABS 이행규칙(Regulation No. 511/2014)의 이중주
남아공의 감기약 '펠라고니움', 유럽 특허가 무너진 진짜 이유
독일과 유럽 약국 진열대에서 기관지염 치료제로 오랜기간 널리 판매되어 온 유명 생약 제제가 있다. 이 약의 주원료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고원지대에서 자생하는 약용식물 '펠라고니움(Pelargonium sidoides)'으로, 현지 원주민들이 수 세기 동안 호흡기 질환 치료에 사용해 온 전통 약재였다.
독일의 한 제약사는 이 펠라고니움 뿌리 추출 공정을 개발하여 유럽특허청(EPO)에 특허를 출원했고, 2007년 유럽 특허(제EP1429795호)를 등록받았다. 그러나 남아공 지역사회와 비정부기구(NGO)들은 "원주민의 동의 없이 전통지식을 무단 활용한 생물해적(Biopiracy) 행위"라며 거세게 반발했고, EPO에 정식 특허이의신청(Opposition)을 제기했다.
치열한 법리 공방 끝에 2010년 1월, 유럽특허청(EPO) 이의신청부(Opposition Division)는 해당 특허에 대해 최종 취소 결정(Revocation)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기업 실무자가 주목해야 할 결정적인 사실이 있다.
EPO 이의신청부가 특허를 취소한 근거는 '유전자원의 무단 반출'이나 '출처 미공개' 때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해당 기술은 공지된 전통 요법 등 선행기술로부터 통상의 기술자가 용이하게 도출할 수 있다"는 '진보성 결여(EPC 제56조)'였다. 남아공 원주민들이 제기한 ABS 관련 윤리적·절차적 문제는 특허 취소 결정문에 법적 근거로 단 한 줄도 반영되지 못했다.
유럽특허청(EPO)의 빗장은 왜 열려 있을까? — 유럽특허협약(EPC)의 구조
이 사건은 유럽의 지식재산권 제도가 지닌 고유한 특징을 명확히 보여준다.
유럽특허기구(EPO)의 설립 근거인 유럽특허협약(EPC)에는 출원 시 유전자원의 원산지나 출처를 명시하도록 강제하는 조항이 없다. EPO 심사지침(Guidelines for Examination)에 따르더라도, 출원인이 해당 자원을 원산지 국가의 법령에 따라 적법하게 취득(PIC·MAT)했는지는 신규성이나 진보성 등을 따지는 실체적 특허 요건이 아니다.
즉, 미국과 마찬가지로 유럽특허청(EPO)에 특허를 출원하고 등록받는 단계에서는 생물유전자원의 출처공개 의무라는 절차적 빗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검문소: 「EU Regulation No. 511/2014」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출처가 불분명한 유전자원을 활용해 사업화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유럽연합(EU)은 특허청이 아닌 '연구개발 및 시장 출시(Market)' 단계에 강력한 규제 장치를 두고 있다.
EU는 나고야의정서를 이행하기 위해 2014년 역내 전역에 직접적 구속력을 가지는 「EU ABS 규칙(Regulation (EU) No 511/2014)」을 제정하여 시행 중이다. 이 규칙의 핵심은 이용자에게 부과되는 '상당한 주의(Due Diligence, 실사)' 의무이다.
이 규정에 따라, EU 역내에서 유전자원(2014년 10월 12일 이후 취득분)을 활용하여 연구개발을 수행하거나 관련 제품을 개발하는 기업과 연구자는 다음 사항을 스스로 입증·보관해야 한다:
- 1. 해당 유전자원이 원산지국의 법령에 따라 적법하게 취득(PIC)되었는가?
- 2. 상호 합의된 조건(MAT)에 따라 공정한 이익공유 약정이 체결되었는가?
이 의무의 이행 여부는 특허청이 아닌 각 회원국의 관할 국가기관(CNA)이 감독한다. 특히 기업은 제품의 최종 상용화 단계(시판 허가 신청, 판매 개시 등)에 도달했을 때, EU 전자포털인 DECLARE 시스템을 통해 '실사 선언서(Due Diligence Declaration)'를 제출하여 적법성을 공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특허는 살았는데, 약은 못 판다?" — 한국 기업을 위한 실무 시사점
유럽연합(EU)의 이러한 "특허요건과 시장규제의 분리구조"는 유럽 진출을 노리는 한국 바이오·제약·화장품 기업에 매우 중대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1. 'EPO 특허 등록 = 사업화에 적법함'이 아니다.
EPO에서 출처를 묻지 않고 특허를 등록해 주었다고 해서 EU 역내 사업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원산지 국가의 적법 취득 증빙(IRCC 등)이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 특허권 보유 여부와 무관하게 EU 시장 내 임상시험 진행, 인허가 취득, 완제품 출시가 전면 중단될 수 있다.
2. 글로벌 라이선스 아웃(L/O) 및 공동연구의 필수 검토 요건이다.
유럽 제약·바이오 기업들은 기술도입(In-licensing)이나 공동 R&D 계약 시, 대상 파이프라인의 'EU ABS 실사(Due Diligence) 서류 패키지'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원산지 적법성 이력이 명확히 소명되지 않는 기술은 계약 단계에서 배제될 위험이 크다.
3. 회원국별 제재 조치에 주의해야 한다.
실사 의무를 위반하거나 허위로 선언할 경우, 개별 회원국 법령에 따라 막대한 과태료, R&D 활동 중지, 관련 제품의 압류 및 회수 처분 등 실질적인 제재가 부과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한 줄 요약유럽특허청(EPO)은 특허심사 시 출처를 묻지 않지만, EU 시장 규제당국은 적법한 출처를 입증하지 못하는 제품의 상용화를 철저히 통제한다. 유럽진출을 목표로 하는 바이오 R&D는 초기 단계부터 '유전자원 취득이력(Chain of Custody)'을 문서화하여 보관하는 전략이 필수적이다.
- [공식 법령 원문]
- [공식 설명 자료]